- [국내 인터뷰] 궐 - 누가 뭐래도 그녀는 천생 음악 하는 여자
- rhythmer | 2009-12-30 | 2명이 이 글을 추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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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이라는 뮤지션을 처음 보면, 서구적인 미모가 눈에 띄지만, 좀 더 알고나면, 시원한 성격과 뛰어난 음악적 능력에 반하게 된다. 그녀는 지플라에서 윈디 시티, 그리고 이제는 솔로 뮤지션으로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여느 뮤지션들과 달리 평생 음악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시원하게 말하는 그녀. 하지만, 인터뷰 내내 궐이라는 뮤지션에게 느낀 건 누가 뭐래도 천생 음악 하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리드머(이하 ‘리’): 궐 씨는 지플라 해체 후에도 여러 활동을 해왔죠?궐: 2007년 11월에 지플라 앨범을 내고 2008년 3월까지 활동했어요. 지금은 윈디 시티 건반으로 들어가서 활동 중이고요. 그전에 윈디 시티 세션을 하긴 했으나, 이번에야 정식 멤버가 된 거죠. 윈디 시티로 활동하고, 딩동댕스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공연도 했고요. 틈틈이 개인 앨범 준비를 일 년 정도 했죠.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음악에 딩동댕쓰의 뉴웨이브적인 요소나 윈디 시티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만든 앨범이에요.
리: ‘이궐’에서 ‘궐’로 이름을 줄인 이유가 있나요?
궐: 특별한 이유가 있죠. 원래 인터넷 검색창에 이궐을 입력하면 중국에 관련된 것만 나왔는데, 얼마 전에 검색해봤더니 함경남도의 방언으로 ‘거지’라는 뜻이 있는 거예요. (전원 웃음)
리: 저도 검색해보고 한참 웃었네요.
궐: 왠지 찜찜하잖아요. 이래서 내가 돈을 못 버나 싶기도 하고. 애들한테 문의전화가 와요. “누나, (이름이) 거지인 거 알아요?” 이러면서. 상관없긴 한데 괜히 신경쓰이는 거죠. 그래서 바꿨어요. (웃음)
리: 첫 솔로 앨범인데,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작업했는지.
궐: 지플라를 하면서 소속사에 속해있다는 것 자체를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제약이 있으니까. 내가 뭘 작업할 때 제작자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제작자는 음악으로 장사하는 사람이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마음에 맞는 제작자 찾기가 쉽지 않아 스스로 제작하기로 했죠. 혼자 일한다는 게, 자유가 주어지지만,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런 게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도 주변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어요. 음악뿐만 아니라 디자인이나 사진 등등. 응원해주는 동료가 많아서 그게 에너지가 되었죠. 그렇게 작업했는데, 상업적인 음악이 나오면 좀 그렇잖아요. (웃음) “그럼 그냥 제작자랑 하던지~.”하는 반응이 나왔겠죠. 나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재미있게 해보자고 해서 악기도 요즘 키보디스트들이 안 쓰는 건반을 쓰고, 놀면서, 즐기면서 작업을 했어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여러 틀을 깼죠. 음악적 통일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여덟 트랙 정도로 만들었고요.
리: 소울맨 씨에 의하면, 자신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던데, 진실은 어떤가요?
궐: 얘가 오지랖이 넓어서, 코러스 라인까지 만들어오더라고요. 워낙 잘 만드는 사람이니까 제가 멜로디 써서 들려주면 “어우~ 누나 구려.”라고 하는데, 그게 맞고. “음, 그래. 네 것이 좋다!” 이러면서 쓰게 되더라고요. 저는 노래를 하던 사람이 아니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머릿속으로 추상적이나마 생각했던, 목소리로 표현하고 싶던 부분을 테크닉적으로 더 많이 아는 친구니까 많이 지도해줬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 친구 덕분에 작업도 빨리 마칠 수 있었구요.
리: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없었나요? (웃음)
궐: 태도. 그 애티튜드가 아주… (전원 웃음)
리: 노래 중에 굉장히 촌스러운 사운드의 건반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게 좀 전에 말한 흔히 쓰지 않는 키보드 소리인가요? 그 옛날 드라마 보면, 카바레에서 나오던….
궐: 네. 맞아요. 카시오 건반이라는 건데, 실제로 80년대 카바레에서 활동하던 아저씨한테 산 거에요. 제 건반은 아니고 김성멘의 건반인데, 그 친구가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제가 주로 쓰죠. 그 당시에는 아저씨들이 음원을 다 만들어서 썼대요. 되게 멋있죠? 그 음원들이 들어 있는 메모리 카드가 있는데, 자기네들만 가진 비밀병기 같은 거죠. 소스가 비슷한데 각자가 쓰는 스타일이 다른가 봐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그걸 낙원상가에 내놓은 거에요. 그걸 얼른 샀어요. 쓰다 보니 정말 재미있더라구요. 요즘 애들이 잘 안 쓰지만, 우리는 그 소스가 낯설지 않잖아요? 그래서 대놓고 뽕짝 사운드를 시도해봤죠.
리: 그 말씀은 이번 앨범의 초점을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맞췄다는 이야기이군요.
궐: 일단 10대 후반 분들은 이 사운드 자체를 모르더라고요.
리: 신스 패드도 사용했죠?궐: 네. 코넬리우스 같은 뮤지션이 그 패드를 가져와서 퍼포먼스를 하더라고요. 음원을 저장해서 세팅하면 건반처럼 쓸 수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사운드를 표현할 수 있죠. 일본 뮤지션들이 많이 쓰는데, 굉장히 재미있어요.
리: 멜로디 연출이 가능한가요?
궐: 가능해요. 그런데 경계가 불명확해서 정확한 소리를 내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죠.
리: 건반 주자로 알려진 궐 씨가 갑작스레 노래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을 것 같아요. 노래에도 원래 욕심이 있었나요?
궐: 욕심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노래를 해보고는 싶었죠. 노래는 음악의 백미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로 표현하는 게 제일 멋있잖아요. 공연할 때도 관중이 악기 하는 사람보다는 보컬을 주로 보잖아요. 그래서인지 노래 잘하는 게 제일 부럽긴 해요. 악기는 비싼 거 사서 연습하면 되지만, 목소리는 타고난 게 제일 크잖아요. 정인 씨의 목소리만 봐도, 정말 타고났잖아요. 누군가가 그 목소리 성대모사를 십 년 동안 한다고 해도 똑같이 할 순 없어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노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떠나 누구도 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밀어붙인 거죠. 그냥 해보자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이기적인 거죠.
리: 주변의 반응은 어때요?궐: 어우, 분란이 아주 심했죠. 특히, 정인 씨 같은 경우는 “언니가 뭔데 보컬을?” 이랬고. (전원 웃음) 소울맨 씨 같은 경우는 비아냥 조로 “그래 한번 해봐~. 파이팅!” 이라고 했고요. 그다지 반응이 좋진 않았어요. 잘해봤자 “재미있겠다.”정도. 어쨌든 제작자가 없으니까 맘대로 했죠.
리: 그래도 궐 씨의 보컬은 담백한 맛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일부러 잘 부르려고 과하게 바이브레이션을 넣거나 했으면 역효과가 났을 텐데.궐: 요즘 노래 부르는 사람들 스타일이 그렇잖아요. 내가 뭐 득음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부르자고 했죠. 그런데 외국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며 춤추려고 하는 경향이 많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따라 부르려고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 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또 그렇게 많진 않다고요. 그냥 평범한 대중들이죠. 그런 대중이 편안하게 부르는 느낌으로 부르자고 생각했죠. 내가 만든 노래, 내가 만든 가사를 내 목소리로 표현하는 거니까 누군가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리: 공연을 할 때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은 보컬리스트인데, 그것에 대한 서운함은 없었어요?
궐: 그런 질문을 자주 받았어요. 워낙 정인 씨 같은 큰 보컬과 작업을 하다 보니…. 그런데 정인 씨의 목소리가 우리 밴드의 목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섭섭하기보단 오히려 고마웠죠. 다만, 지플라라는 이름보다 정인이라는 이름만 알려졌을 때는 좀 안타까웠죠.
리: “껌”이란 곡에서는 랩까지 시도했죠? 이게 참 어설픈 듯하면서도 상당히 중독적입니다. (웃음)
궐: 요즘 대세는 랩이죠. (전원 웃음) 허경영 아저씨가 이미 한 번 저질러 놨기 때문에 그것보단 질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일단 제가 해보니까… 할만해요. (웃음) 정인 씨 같은 경우는 저와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서로의 취향을 잘 알거든요. “껌”노래를 만들고 나니 같이 작업을 하면 즐거워할 거란 걸 알고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제가 랩한 걸 들려주니 애드립 치고 난리가 난 거에요. 작업하기 전에 대단한 예술가 둘이 만난 것처럼 상황을 설정했어요. “배경은 반 지하야. 아침에 일어났는데, 게으른 여자가 껌이 안 떨어져서 고뇌하는 그때! 그거야!” 하고 바로 레코딩에 들어갔죠.
리: 가사의 리듬감이 돋보였어요.
궐: 아우, 그럼요. 랩에 라임이 얼마나 중요한데.
리: 오우 라임! 좀 알고 하셨네요. (전원웃음) 참, 지플라의 마지막 싱글이었던 “음악 하는 여자”를 궐 씨 버전으로 재편곡해서 실은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궐: 처음 작업했을 때도 제가 부르긴 했어요. 근데 들어본 분들이 음악을 하는 여자가 삶이 너무 고달파서 죽기 전에 한강 다리 위에서 부르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원곡에서는 정인 씨가 훵키하고 발랄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제 나름대로 담담하게 부르는 것도 느낌이 좋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제 목소리를 담아 앨범에 넣게 되었어요.
리: 어떻게 탄생한 곡인가요?
궐: 예전에 제가 제작자와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진짜 돈이 없었어요. 돈을 벌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고 가는데 너무 성질이 나는 거에요. 그런데 창밖을 본 순간 “그래도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사가 떠오르더라고요. 그 때 한 번에 나온 가사가 이 곡이에요. 집에 가서 멜로디와 코드도 한 번에 만들었는데, 잘 나온 것 같아 아끼는 곡이죠. 제 얘기가 담긴 곡이라 그렇기도 하고요
리: 타이틀곡으로 “미워하면 닮는다”를 선정한 이유가 있다면?
궐: 작업하면서부터 타이틀곡으로 해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옛 남자친구를 떠올리며 가사를 쓰긴 했지만, 연인 관계를 떠나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사라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엄마를 많이 싫어했는데, 커서 돌이켜보니 내가 엄마와 많이 닮았더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누굴 죽도록 싫어해도, 싫어하는 만큼 내게 담기더라고요. 어느 날 모르게 내 속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런 경험을 몇 번 했더니 가사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더라고요. 사람이 항상 좋은 사람만 될 수 없고 항상 나쁜 사람만 될 수도 없는 것처럼 내가 사랑한다고만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양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처럼 사랑해도 닮지만, 미워해도 닮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리: 지플라 때도 그랬지만, 앨범에서 노래만큼이나 가사가 차지하는 부분이 대단히 커요. 궐 씨의 가사는 특히, 여성분들에게 많은 공감을 살 만한데요. 작사할 때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궐: 저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화두가 영감처럼 오면 가사로 풀어내는 작업을 즐기죠.
리: 궐 씨의 작사 솜씨를 보면 작사가로서 다른 뮤지션의 작업에 참여해도 어울릴 것 같아요.궐: 글쎄요. 아직까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제 가사가 다른 뮤지션한테는 잘 안 입혀지는 것 같아서요. 우리나라 작사가 중엔 간혹 인맥 타고 장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맞춰가는 것도 싫고요. 그래도 마음이 맞는다면, 재미있게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죠. 그런데 저는 작사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하면 막히더라고요. 돈을 생각하면 안 써져요. 괜히 함경남도 방언으로 이궐이 아닌 거죠. (웃음)
리: 외국은 보컬리스트의 가사도 재미있는 주제가 많잖아요.
궐: 그러니까요. 곡을 들을 때 가사가 재미있고 독특하면 좋겠는데, 우리나라 노래들은 너무 쥐어짜요. 같은 단어의 반복, 끼워 맞추기가 심하죠.
리: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 “아리랑”은 굉장히 신선했어요. 의외다 싶기도 하고요. 어떤 계기로 작업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궐: 원래는 이 곡을 DJ들과 함께 작업해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혼자 작업하게 되었어요. 외국 친구들한테 들려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신선하다고. 사실 퓨전이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잖아요.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으로 많은 곡이 나왔지만, 이벤트성에 가까웠고요. 외국에 나가보고 느낀 건데,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더라고요. 그런 요소를 어떻게 놓치지 않고 작업하느냐가 관건인 거죠. 이 요소를 요즘 트렌드와 맞춰 작업해보고 싶어서 만들게 된 곡이에요. 중간에 공(악기) 소리도 넣고, 익살스럽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거기에 창과 보코더를 접목시켜서 우리나라적인 아날로그와 차가운 디지털을 만나게 했죠. 작업이 정말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해보고 싶어요.
리: 이 외에도 앞으로 해보고 싶은 신선한 시도들이 있나요?
궐: 우쿨렐레를 메인으로 내세운 앨범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제 생각에 우쿨렐레가 앞으로 국내에서 매우 활성화될 것 같거든요. 일본 뮤지션들 중에 그 악기를 쓰는 사람이 꽤 돼요. 하와이와 가까워서 그런지…. 보니까 다루기도 되게 쉽고, 소리도 재미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적인 사운드죠. 본격적인 우쿨렐레 앨범이 나오기 전에 선빵날리려고요. 뭔가 입질이 왔거든요. (웃음)
리: 이번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나 애착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요?궐: 다 아쉽죠. 그렇다고 그 욕심을 채우려면 한도 끝도 없고요. 이 앨범으로 제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대신 저는 스스로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깡은 있어요. 제가 별로 가진 건 없지만, 미친척하고 그냥 가는 거에요. 그렇게 계속 갈 수 있는 에너지만 식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에너지가 식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고요. 앞으로 앨범을 내도 항상 아쉬운 점이 있겠죠. 그 아쉬운 것 때문에 앨범을 계속 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그 아쉬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죠. 지금 제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거에요.
리: 뮤지션 중엔 간혹 스스로 그 부분을 메우려 애쓰다가 실패하는 케이스도 있죠.
궐: 그러다가 피해의식이 생기는 것 같아요. 루저가 되는 거죠. 괜히 다른 사람 디스하고 다니고. 전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전 저 자신을 칭찬하고 싶지도 않고, 현재의 제 모습을 정리한다는 개념으로 앨범을 내고 싶어요. 그렇다고 평가절하하지는 말아주시구요.
리: 정규 앨범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 년에 한 장 정도는 만나볼 수 있겠죠?
궐: 그건 좀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게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지키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냥 정리가 되는 대로 내려고요. 제 것만 하는 게 아니니까 스케쥴 조정도 해야 하고.
리: 궐 씨의 이미지는 ‘자유로운 영혼’ 같아요.
궐: 자유롭다고 해서 책임감 없이 구는 건 위험한 행동 같아요.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저는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 거죠. 그런데 음악이 좋은 만큼 뮤지션의 인생도 좋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정말 불행한 것 같아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재미있게 사는데, 음악도 좋게 나와서 그걸로 더 즐겁게 사는 것, 그게 제 목표에요.
리: 이제 궐 씨도 어느덧 녹록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는데, 그동안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떤 것 같아요?
궐: 재미있었어요. 추억도 많았고요. 당시엔 심각했던 일도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리 나쁜 일이 닥쳐도 지나면 좋아질 거로 생각해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즐겁고 감사한 일만 많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있고,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매우 좋죠. 그런데 평생 음악만 하고 싶진 않아요. 음악만 생각하고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음악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싶기도 하거든요. 음악적인 사람으로는 평생 살고 싶지만, 음악 외에 다른 일도 해보고 싶어요.
리: 예를 든다면요?
궐: 만드는 일. 핸드메이드 장난감 같은 거 있잖아요.
리: 흥미롭네요. 음악을 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해요.
궐: 제가 의식적으로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거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에요.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때죠. 공부가 싫었거든요. (웃음) 제가 교포같이 생겼지만, 충남 당진 시골 출신이에요. 그런 데는 선생님은커녕 예고를 가는 친구들도 없는 곳이에요. 우리 어머니가 제가 원하는 일을 많이 믿고 지원해주셨어요. 집이 풍족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한다리 한다리 건너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교수님 댁 전화번호를 알아낸 거에요. 우리 딸이 작곡을 하고 싶어하는데, 여긴 시골이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릴 도와줄 수 있겠느냐 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까 그냥 얘길 하게 되더라고요. 찾아갔더니, 교수님이 저를 뒤로 앉혀놓고 피아노를 치는 거에요. 음을 맞춰보라면서. 그런데 저는 꼬맹이 때부터 피아노를 친 사람이라 그걸 맞혔죠.
리: 절대음감의 소유자였군요.
궐: 그런 끼가 있었어요. (웃음) 어쨌든 그러더니 제일 밑에 있는 도를 치는 거에요. 그래서 “도요.”라고 했더니 잘 들어보래요. 하프처럼 피아노는 밑으로 갈수록 줄이 길고 두껍거든요. 소리는 진동이라, 잘 듣다 보면 그 안에 파형이 다 들려요. 도와 연결되어 있는 숨어 있는 소리를 들어보래요. 들어보니까 한 옥타브 높은 도가 들리고, 솔이 들리는 거에요. 자연배음현상이라는 건데, 사람들이 싫은 소리와 듣기 좋은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건 본능이라는 거죠. 아무튼, 그걸 맞추고 결국, 그 교수님이 있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내가 하고 싶던 일들을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거에요. 학생들도 그렇고 가르치는 방식도 그렇고. 홀딱 깨서, 장학생이었음에도 학교를 때려 쳤어요. 집에는 계속 학교에 다니는 것처럼 하고 혼자 재즈 공부를 시작했죠.
리: 클래식을 공부하다 흑인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궐: 학교를 그만두게 된 계기가, 제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누가 “이거 재즈 같다.” 이러는 거에요.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무의식적으로 찬송가에서 영향을 받았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재즈가 뭐지?”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재즈아카데미를 가게 되었죠. 그런데 막상 재즈를 시작해보니 정말 재미있는 거에요. 클래식은 작곡가의 의도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재즈는 똑같은 곡을 가지고도 연주자에 의해 다른 느낌을 낼 수 있어요. 그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내가 작곡가일지라도 연주자의 시각에 맞추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재즈는 흑인음악의 요소가 있으니까 흑인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요즘에 흑인음악, 백인음악 가리는 것도 좀 웃기잖아요. 내가 흑인음악을 한다고 해도 막상 흑인들이 봤을 땐 완전 오리엔탈이잖아요. 쉽게 분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말이긴 하지만, 음악을 그렇게 나눈다는 건 좀 위험한 것 같아요. 갈수록 그런 말을 쓰는 게 좀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리: 집에 숨겼던 걸 보면, 역시 부모님은 대중음악을 한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나 봐요?
궐: 빨리 선봐서 결혼하라고 하시죠. 그래서 부모님 전화를 잘 안 받아요. 그냥 꺼버려요. (웃음)
리: 뮤지션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궐: 사랑? 사랑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물론, 음악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욕심을 내고 싶진 않아요. 사랑이라고 해서 연인의 사랑만을 생각하는 건 너무 좁은 개념이고요. 인간관계 전반에서 나타나는 사랑이요.
리: 앞으로도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앨범을 계속 발매할 생각이에요?
궐: 그런 곡들이 만들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고. 연주만 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다만, 우리나라 연주곡 시장이 워낙 작다 보니 어떨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는 노래에 대한 욕심이 크잖아요. 제가 스스로 만드는 앨범이다 보니 제약이 적어서 뭐든 가능할 것 같아요. 앨범이 잘 안 나온다는 건 제가 그만큼 게을러졌다는 소리겠죠. 그래서 최대한 꾸준히 할 생각이에요.
리: 솔로 앨범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궐: 영상, 마임과 제 음악을 합쳐서 공연해보고 싶어요. 너무 인디스럽고 실험적인 게 아니라, 제 음악과 코드가 맞는 친구들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은 거에요.제 음악이 마임하는 친구에게는 OST가 되는 거고, 영상은 저의 뮤직비디오가 되는 거죠. 생각보다 주변에서 흔쾌히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의외로 우리나라에 이런 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런데 기획이 없고 기획력도 떨어지죠. 마음만 앞서서. 그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누가 나서서 해줬으면 하는데, 리더의 자질이 다들 부족한 것 같아요. 잘나서 리더를 한다기보단 무조건 모여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저는 이런 다양한 시도가 좋아요. 옷을 입더라도 단정하게 입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말도 안되게 입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말도 안되게 입는 사람이 더 재미있고 노력상이라도 주고 싶어요. 예를 들어 폴로 티에 샤넬 체인 벨트를 맨다든지, 안 맞는 조합인데도 그것에 대한 에너지가 보이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시도에 대해 자비롭게 좋다고 칭찬해줬으면 좋겠어요. 다르다고 욕하지 말고. 잘한다고 용기를 북돋아주면 처음엔 어설퍼도 나중엔 뭐든 해내지 않을까요? 크리에이티브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주춤하지 말고 계속 밀고 나갔으면 하고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작자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갈 예정이에요. 또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서 다양한 루트를 마련하는데 기여하고 싶어요. 물론, 제 솔로 앨범과 윈디 시티, 딩동댕스의 활동도 이어나갈 예정이고요.
기사작성 / RHYTHMER.NET 강일권, 민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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